서울시 창덕궁 낙선재 트레킹

2024. 6. 7. 09:302024.06.01 NEW POST

현충일 날 .. 창덕궁 낙선재 트레킹

 

Now ~ Let's start photo Surfing!

 

NO.1 낙선재樂善齋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제24대 왕 헌종憲宗과 후궁後宮 경빈 김씨의 애틋한 LOVE STORY 가 서려있는 곳 입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 현판(懸板)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樂善齋라고 하면 낙선재 건물 하나만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보통은 낙선재와 다른 부속 건물들을 통틀어서 부르기도 한다. 좁게는 낙선재.석복헌.수강재를 가리키며, 넓게는 건물 뒷편의 화계.상량정.한정당.취운정까지 통틀어서 낙선재樂善齋 권역圈域이라고 표현한다.

 

 

2024.06.06 .. 창덕궁 숙장문肅章門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창덕궁 숙장문肅章門 .. 창덕궁의 문門으로 정문正門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가서 금천교錦川橋를 지나 중문中門 진선문進善門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인다. 숙장문肅章門의 이름은 1475년(성종.6) 8월에 당시 예문관대제학 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 라는 의미이다. 이 문門 통과하여 우측으로 돌아서면 낙선재 樂善齋 권역(圈域)이 나타난다.

 

 

낙선재樂善齋 라고 하면 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를 통칭한다.

낙선재樂善齋는 한눈에도 창덕궁의 다른 건물과 현저하게 구별이 된다. 이유는 빛깔(色)이다. 낙선재에는 단청丹靑이 없다. 그래서 단아하고 질박한 느낌을 준다. 왕(君)이 아니라 사대부가 조성한 저택과 같다. 헌종憲宗은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단청을 배제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낙선재樂善齋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라는 의미의 건축물이다. NAMDEOKYUSAN이 낙선재를 돌아보고 느낀 소감所感 입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圈域)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圈域)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들어가는 장락문長樂門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장락문長樂門 .. 낙선재 정문正門 이다. 흥선대원군(이하응)이 현판懸板을 썻다.

 

 

2024.06.06 .. 낙선재樂善齋 내부를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장락문長樂門을 통해서 낙선재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건물 뒤 상량정上凉亭(정자)이 조망된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樂善齋 .. 조선시대 헌종憲宗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로서 .1847년(헌종.13) 지었다. 낙선재 바로 옆에 헌종憲宗 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 석복헌錫福軒이 있으며 석복헌 옆에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 수강재壽康齋가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후원에는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하여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을 볼 수 있다. 낙선재 일원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 황후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가족이 생활 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 현판(懸板)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樂善'의 뜻은 '선을 즐긴다' 의미이다. <맹자>에서 나온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으로 선善을 즐겨서(樂善) 게으르지 않는 것(不倦)을 천작天爵 이다' 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현판懸板 글씨는 청나라 문인 섭지선(葉志詵, 1779 ~ 1863)의 글씨이다. 단, 집자集字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2024.06.06 .. 낙선재樂善齋 건물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로 들어오는 순정효황후(맨 앞에), 그 뒤로 성옥염 상궁 모습이다 (나무위키 자료 사진)

낙선재樂善齋에는 1962년 덕혜옹주가, 1963년에는 의민태자(영친왕)와 이방자 여사가 귀국을 하면서 낙선재樂善齋 권역에서 순정효황후와 함께 살았다. 이 때 낙선재樂善齋 본채는 의민태자 -이방자 부부가 살았고석복헌錫福軒은 순정효황후가, 그리고 수강재는 덕혜옹주가 사용했다순정효황후는 1966년, 영친왕은 1970년, 그리고 덕혜옹주와 이방자는 1989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낙선재는 마지막 조선 왕족이 살았던 곳이 되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 빙렬문(氷裂文)  담벼락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樂善齋 누마루 아래에는 얼음이 깨져 있는 듯한 빙렬문(氷裂文) 담벼락이 있다. 안쪽에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이는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고안한 장치였다 한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 만월문(滿月門)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만월문滿月門 .. 낙선재 누마루에는 만월문이 있다. 창호에는 만호卍, 아亞, 정丁 자(字) 모양의 살에 당초무늬, 마름모고리무늬 등 다양한 장식을 추가하여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확인 할 수 있었다.  2012년 보물 제1764호로 지정이 되었다.

 

 

낙선재 창살 ..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살과 창살도 독특하다. 평상시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식별하기 어렵지만, 문양이 단순하지 않다. 마치 서양의 현대 화가들이 그려낸 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입체감을 살리고 조형미를 오롯이 담아냈다. 형태와 질감이 다양해서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낙선재 창살 ..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살과 창살도 독특하다. 평상시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식별하기 어렵지만, 문양이 단순하지 않다. 마치 서양의 현대 화가들이 그려낸 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입체감을 살리고 조형미를 오롯이 담아냈다. 형태와 질감이 다양해서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낙선재 창살 ..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살과 창살도 독특하다. 평상시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식별하기 어렵지만, 문양이 단순하지 않다. 마치 서양의 현대 화가들이 그려낸 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입체감을 살리고 조형미를 오롯이 담아냈다. 형태와 질감이 다양해서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낙선재 창살 ..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살과 창살도 독특하다. 평상시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식별하기 어렵지만, 문양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서양의 현대 화가들이 그려낸 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입체감을 살리고 조형미를 오롯이 담아냈다. 형태와 질감이 다양해서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낙선재 창살 ..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살과 창살도 독특하다. 평상시에는 관람객을 위하여 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식별하기 어렵지만, 문양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서양의 현대 화가들이 그려낸 추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입체감을 살리고 조형미를 오롯이 담아냈다. 형태와 질감이 다양해서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 사이에 있는 담벼락도 특이하다. 거북이의 등껍데기를 닮은 귀갑문龜甲紋 문양이 있다. 이것은 거북이 등처럼 왕王이 만수무강 하시길 기원하는 장식이다.

 

 

2024.06.06 ..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 사이에 있는 공간(路)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를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헌종.13년)이 지었다헌종은 낙선재樂善齋에서, 후궁 경빈 김씨는 낙선재 바로 옆 석복헌錫福軒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수강재壽康齋도 낙선재 영역으로 편입을 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여 뒤 1849년에 헌종은 승하했고 경빈 김씨는 궁(宮)을 나와서 사가(私家) 안국동 일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낙선재樂善齋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2024.06.06 .. 낙선재 뒤뜰에 있는 화계(花階)라는 계단식 후원(後園)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뒤뜰에는 화계(花階)가 마련되어 있다. 화계는 수목樹木을 심은 층계 형태의 계단을 의미하는데, 낙선재가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낙선재 뒤뜰을 거닐면 다소 이질적인 느낌이 생겨난다.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신선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괴석怪石 탓이다. 괴석은 인간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생김새가 매우 기묘하다. 괴석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임금(王)에 비유되는 봉황(鳳皇)이 새겨져 있다. 또한 괴석 옆에는 금사연지'(琴史硯池) 라는 글자가 음각된 정사각형의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뒤뜰의 또 다른 볼거리는 굴뚝으로, 공예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됐다. 굴뚝을 받치고 있는 구조물에는 장수를 뜻하는 '수'(壽) 자가 있다.

 

 

2024.06.06 .. 낙선재 한정당 閒靜堂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뒤뜰에는 화계(花階)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윗쪽으로 상량정上凉亭, 한정당 閒靜堂, 취운정翠雲亭이 있다. 그러나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멀리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낙선재樂善齋 건물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 상량정上凉亭(정자)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상량정上凉亭 .. 상량(上凉)의 뜻은 '시원한 곳(凉)에 오르다(上)' 이다.  낙선재 후원에 있는 육각형의 아름다운 정자亭子 상량정 이다. 본래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 라고 하였다먼 나라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으로 이 정자가 지어지던 19세기를 전후하여 서양의 여러 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낙선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NO.2 석복헌錫福軒에 대해서 알아보자

2024.06.06 .. 석복헌(錫福軒) 내부를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낙선재 석복헌(錫福軒)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석복헌錫福軒 .. 석복헌과 수강재壽康齋는 왕실의 여성이 거주하던 처소였다. 낙선재 본채 보다 1년 늦은 1848년(헌종.14)에 지었으며 헌종의 후궁(後宮) 경빈 김씨가 머물렀다. 

 

 

2024.06.06 .. 낙선재 석복헌(錫福軒)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849년(헌종.15)에 헌종이 승하 하였고, 후궁인 경빈 김씨도 궁(宮)에서 나왔기에 석복헌錫福軒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2024.06.06 .. 낙선재 석복헌 현판(懸板)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1912년에 고종高宗(조선 제26대 왕․대한제국 제1대 황제)의 친형 흥진왕이 붕어하자 순종純宗( 조선 제27대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석복헌 동쪽 뜰에서 망곡했다. 

 

 

2024.06.06 .. 낙선재 석복헌 현판(懸板)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1917년 대조전大造殿이 화재로 전소되자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잠시 석복헌錫福軒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1966년 2월 3일 순정효황후가 이 곳에서 붕어(사망)했다. 모는 낙선재樂善齋와 비슷하지만 앞마당이 좁아서인지 훨씬 조촐하게 느껴진다.

 

 

2024.06.06 .. 낙선재 석복헌錫福軒 방문房門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NO.3 수강재壽康齋에 대해서 알아보자

2024.06.06 .. 수강재壽康齋 내부를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낙선재 수강재(壽康齋) CAMERA에 담았습니다. 

수강재壽康齋 .. 수강재는 역사가 오래된 건물이다. 태종太宗(조선 제3대 왕)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 머물기 위해서 지었고, 세조世祖(조선 제7대 왕)에 의해서 폐위된 단종端宗(조선 제6대 왕)이 잠시 생활하기도 했다헌종은 할머니를 위해서 수강재를 중수했다 전한다.. 

 

 

2024.06.06 .. 낙선재 수강재 현판(懸板)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1785년(정조.9)에 처음으로 지었다.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서 창경궁에 자경전을 지으면서 공사하고 남은 자갈과 벽돌을 모아 임시로 산(山)을 만들었는데 이를 철거하고 지은 것이다. 광복 이후 1962년에 일본에서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돌아온 뒤 1989년 4월 21일 서거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낙선재 석복헌錫福軒에서 수강재壽康齋로 들어오는 문門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수강재壽康齋에서 밖으로 나와서 고목古木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낙선재 수강재壽康齋에서 밖으로 나와서 수강재 옆 건물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을 파노라마(PANORAMA) 형식으로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圈域)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입장入場 TICKET을 CAMERA에 담았습니다.

 

 

2024.06.06 ..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TREKKING을 다녀왔습니다.

 

 

2024.06.06 .. 낙선재樂善齋 TREKKING을 마치면서 NEXT POSTING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