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週의 제 TISTORT 主題 .. 어렸을 때 安息處였던 초가草家 입니다. |
초가草家 : 짚이나 새, 갈대 따위로 이엉을 엮어서 지붕을 인(만들은) 집을 말한다.
볏집, 밀짚, 갈대 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이다. 선사시대에 본격적인 집의 형태가 생겨날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로 서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 형태이다.
조선朝鮮의 가옥중 70~80%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이던 집으로 양반兩班, 평민平民이 가리지 않고 살았던 곳이다.
초가草家 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기와집에 대한 상대적인 말로서 우리 나라의 초가는 대부분 볏짚을 사용하고 있다.
초가 지붕의 기원은 주거 양식이 형성形成 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수혈 주거나 움집 등의 구조에서는 중앙부가 높은 몽고 지방의 주택 양식과 흡사하였으리라 믿어지나, 차츰 우리 나라 고유 형태의 초가지붕으로 변화하였으리라 추측된다. 즉, 초기에는 벽이 없이 땅을 웅덩이 같이 파고 그 위에 단순하게 지붕을 씌운 것이었다.
그 뒤 중앙부에 기둥이 서면서 서까래가 만들어지고, 다시 집의 내부 바닥이 지면까지 올라오면서 기둥이 네 모서리에 세워지고 담과 지붕이 분리되는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때부터 처마가 그 형태를 갖추어 요즘과 같은 기능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초가의 역사는 기록이 미약하여 상세하게 알 수 없으나 벼농사가 시작된 삼국시대에 이미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가草家 : 보통 주방1, 방2의 구조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주방1 방1의 집에서 가족들이 엉겨서 살아야 했습니다.
초가삼간草家三間 이라 하여서 방마다 3~4평으로 원룸(ONE ROOM)과 비슷한 구조이다.
보통 주방1, 방2의 구조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주방1 방1의 집에서 가족들이 엉겨서 살아야만 했다.
대부분 단층으로 2층 가옥이 극소수인 이유는 온돌바닥의 무거운 무게를 2층 이상에 설치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ㄱ자로 한칸이라도 붙는 순간 그 집은 꽤나 잘사는 집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초가집을 짓는데도 규제가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원칙대로라면 일반인들은 10칸이 한계였다.
단열斷熱이 잘되어서 여름애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지만, 지붕이 수시로 썩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다. 거기에다가 방역防疫이 잘 되지 않던 시절에는 벌레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궁뱅이류였다. 지붕 이은지 조금만 오래되어도 천장에서 한 마리씩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 벌레들은 짚을 먹고 자란 깨끗한 곤충으로 약용藥用이나 식용食用으로 좋아서 간식으로 꽤 먹었다고 하며, 가뭄이나 홍수로 작황이 안 좋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보릿고개가 찾아왔을 때에도 <구황식품救荒食品>으로 먹었다고도 한다.
물론 저런 벌레들이야 위험할 것도 없고 먹을수도 있었다지만, 문제는 <지네> 같은 독충들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지네 자체가 상기한 대로 잡아먹을 곤충이 많고 따뜻한 썩은 지푸라기에 잘 꼬이기 때문이다.
단열斷熱이 잘되어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지만, 지붕이 수시로 썩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습니다.
초가집이 워낙 흔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선 초가집 자체가 옛 조선 민중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다만 김수로왕이 초가로 집을 지어서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지배층들도 초가집을 지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가 지배층들 사이에서 널리 보급되면서 서민들의 주거지로 인식이 확 달라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화재에 취약하다는 인식도 강했기 때문에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시대 때 아예 화재위험을 이유로 도성都城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교체하도록 장려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1426년 한양 대화재大火災로 인해서 1,780채나 되는 집이 불에 탔을 때 그 과반수가 초가집이었을 정도로 화재火災에 약한 것이 흠이었다.
화재에 취약하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시대 때 아예 화재 위험을 이유로 도성都城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교체하도록 장려하기까지 했습니다.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던 일부 지역에서는 볏짚보다 덜 썩는 갈대와 억새를 사용하기도 했다. 갈대집이든 억새집이든 초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오래 간다. 초가의 경우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지붕을 교체해야 하지만 억새나 갈대의 경우 잘 이으면 40~50년도 간다고 할 정도다. 다만 지붕을 얹을 만큼 대량으로 구하는 게 어려워 재료를 대량으로 구하기 가능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를 샛집이라고 하는데 지리산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회덕마을에 원형이 보존된 샛집이 남아있다. 갈대는 주로 강가 지역에서 많이 보였다.
지금은 민속촌民俗村에서나 볼 수 있는 <초가草家> 입니다. 어렸을 때는 초가집에서 잠도 자고 초가 지붕을 새 볏짚단으로 교체를 할 때에는 <굼뱅이>도 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의외로 196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유는 당대에는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건축하기에 건축비가 많이 들었는데 일제강점기 때는 인구의 다수가 소작농이었고, 해방 이후로도 한국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서, 상당기간 빈국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짓고 살만한 사람들이 적었다. 더군다나 초가집은 매우 구하기 수월하던 재료로 만들었던데다가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상부상조하는 게 보통이었기에 인건비도 별로 들지 않았고, 설사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비가 적게 들었고 초가집은 그냥 판잣집을 짓는 것에 비해서 (여름에는 벌레가 생기고 겨울에는 화재가 날 위험도 있었지만) 단열도 잘 되었기 때문이다.
2022.11.13.(일) ..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던 일부 지역에서는 볏짚보다 덜 썩는 갈대와 억새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문물이 대거 들어와서 서양식 건축이 대세를 이루게 될 때에도 돈이 없던 당시 서민층으로서는 초가집을 짓는 게 집을 마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1970년대 초엽까지는 도심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초가집이 즐비했다. 다만 지붕 갈기 귀찮은 점은 존재했기 때문에 1950년대~1960년대에는 페인트 비슷한 화공약품을 뿌리기도 했다. 이걸 뿌리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교체를 하였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농촌에서도 초가집은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행정력이 완전히 미쳤던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벽촌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초가집이 남아있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현대식 농가주택으로 재건축되는 과정 등을 거치며 사라졌다.
2022.11.13.(일) ..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농촌에서 초가집은 대부분이 사라졌다.
북한에서도 한발 앞서서 1960년대에 도시지역에 아파트를, 농어촌 지역에는 문화주택이라는 현대식 가옥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초가집이 사라졌다. 현대 북한에서 초가집처럼 보이는 가옥들은 대부분 겨울철 단열 목적으로 일반적인 문화주택의 지붕을 볏짚 등으로 덮은 것이며, 전통적인 초가집이 아니다. 그렇치만 황해도 지역에는 초가집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지금은 상상이 전혀 안되지만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강남구 대치동에도 초가집이 존재했는데 이 사진은 현재의 은마아파트 뒤 하이스턴 아파트 자리에서 촬영되었다.
현대에서 초가집은 하회마을, 양동마을, 낙안읍성 같은 일부 보존된 전통마을이나 민속촌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곳들은 기관에서 지원금을 받거나 관광산업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압동의 풍납백제문화공원에도 초가집이 있는데, 이 초가집은 백제百濟 집자리를 재현한 전시관이다.
심지어 지금은 상상이 전혀 안되지만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강남구 대치동에도 초가집이 존재했는데, 이 사진은 현재의 은마아파트 뒤, 하이스턴 아파트 자리에서 촬영이 되었다. 참고로 분당신도시의 중앙공원에도 초가집이 1채 보존되어 있다.
초가草家 .. 조선朝鮮의 가옥중 70~80%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이던 집으로 양반兩班, 평민平民이 가리지 않고 살았던 곳이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세웠던 가궁(假宮)은 토계(土階) 위에 세우고 초가지붕을 이은 것이며 초가지붕의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은 소박한 형상이었다.
중국의 기록인 <구당서 舊唐書> 열전에는 고구려에 대하여 “고구려인들은 살림집을 반드시 산곡에 짓는데 대부분 이엉을 이어서 지붕을 만든다. 다만 부처님을 모신 절이나 신묘·왕궁·관부(官府)의 집들은 기와를 얹었다. 가난한 백성들의 습속으로 겨울에는 모두들 장갱(長坑:구들)을 설치하고 불을 지펴 따뜻하게 난방한다”고 기록을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1] 서라벌에 부자들이 살아서 초가가 한 채도 없다고 기록한 것과 [2] 고려의 도성에 초가를 모두 없앴다고 한 것은 초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반증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의 국력이 한창이던 헌강왕 때 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내려다보면 초가를 한 채도 조망할 수 없었다 한다.
그래서 재상에게 그게 사실인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서라벌 안에 초가가 한 채도 없다고 보고를 하였다 한다. 고려·조선조에는 도성내의 모든 집을 기와로 이도록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도성내에는 기와집이 많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도성내의 큰 화재 때문에 3분의 1 이상의 집이 불타는 등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못했다.
초가草家 : 볏집, 밀짚, 갈대 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이다. 선사시대에 본격적인 집의 형태가 생겨날 때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주로 서민들이 짓고 살았던 주택 형태이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경제적인 사정이 극도로 나빠져서 도성都城 내에 초가들이 상당히 들어섰다. 초가草家가 존재하게 된 이유 중 또 하나는 토호(土豪)나 사대부들이 계급 구조적 마을을 이루고 사는 데 있었다. 즉, 대부분의 마을은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소규모 초가들이 자리잡고 있는 형태이다.
큰 기와집에는 사대부·토호들이 살며 초가에는 그에 딸린 마름이나 노비들이 살았다. 경주시의 양동마을이나 안동의 하회마을 등에서 그와 같은 것들이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들은 초라한 초가草家에 살기도 하였다.
초가집을 짓는데도 규제가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원칙대로라면 일반인들은 10칸이 한계였다.
초가 지붕의 종류는 <지붕의 재료·형태>에 따라서 분류하여 설명할 수 있다. 지붕의 재료에 따른 분류는 [1] 순수 초가 [2] 샛집으로 구분이 되는데 순수 초가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한 것이고, 샛집은 새〔茅〕로 이어 지붕을 만든 것이다. 지붕에 새를 이는 것은 1, 2년에 한번씩이다.
제주도에서는 나래를 엮지 않고 새를 펴서 그 위에 새줄로 그물같이 얽어매어 바람에 날리지 않게 하고 있다. 샛집은 울릉도와 육지에도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형태에 따른 분류는 지역에 따라 이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제주도의 경우 이엉이 태풍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이나 그물로 덮어 지붕 위는 새끼줄의 격자무늬가 생기게 된다.
전라남도의 장흥·강진·보성 등지의 초가 지붕 위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유지기>라는 것이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초가지붕의 용마루에 굵은 통대나무나 통나무를 가로지르고 이 위에 용구새를 덮고, 나무와 나무의 이음새나 좌우 양측에 볏짚 한단 가량을 단단히 묶어맨다.
실제로 1426년 한양 대화재大火災로 인해서 1,780채나 되는 집이 불에 탔을 때 그 과반수가 초가집이었을 정도로 화재火災에 약한 것이 흠이었다.
또 수냉이 쪽을 낫으로 잘라서 가지런히 한 다음에 이것을 거꾸로 용마루에 잡아매어서 마치 상투를 틀어올린 모양을 이룬다. 유지기는 한 지붕에 하나만 올리는데, 두 세 개를 올린 집도 있으며 보통 一자지붕에만 쓰인다.
그리고 <똬리집>이란 형태가 있다. 이것은 지붕의 형태가 또아리처럼 둥근 모양을 한 형태에서 온 것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서북지역에 많이 분포한다. 집의 벽은 완전히 붙어 있으며 안마당에서 본 하늘은 둥글고 매우 좁다. 초가 지붕집에는 까치구멍집이 있는데 지붕은 대체로 모임지붕의 형태를 이룬다.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던 일부 지역에서는 볏짚보다 덜 썩는 갈대와 억새를 사용하기도 했다.
초가草家의 지붕은 다양한 유형을 지녀왔다. 이것은 뒷날 기와지붕의 형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붕의 구성이 가구(架構)와 공포에 직접 관련이 되므로 초가지붕의 발달과 완성은 기와지붕을 낳게 한 모태였다. 초기의 초가지붕은 지붕과 벽체의 구분이 없었으며 뒤의 어느 시기에 벽체와 지붕이 나누어져 구조되었다.
이 때 비로소 처마가 생긴 것인데, 지붕의 형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지붕과 벽체가 함께 만들어지던 시기의 지붕의 형태는 원추형(圓錐形)이거나 산개형(傘蓋形) 또는 탄두형(彈頭形)이었으며 평면형도 타원형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초가지붕의 외형이나 윤곽은 그것을 구조하는 사람들의 심성에 따라서 형상화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자연 속에서 함양하여 온 그 나름의 인격에 따라 건축물을 축조하고 조형화해 나가는 것이다. 마을 뒷산 봉우리의 산세와 지붕의 곡선의 일치는 초가지붕만 가지는 독특한 멋이라 할 수 있다.
샛집 .. 지리산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회덕마을에 원형이 보존된 샛집이 남아있다.
그래서 자연친화의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산(山)의 형상을 지붕의 형상 속에다 실현해낸 대담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초가삼간> 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표현으로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주거의 최소 단위를 나타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초가草家는 부유한 기와집에 대하여 삼간三間은 그 이상의 여러 칸 혹은 수십 칸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나타낸 말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 농촌의 초가는 봄철에 처마 밑에 심은 호박과 박넝쿨이 새끼줄을 따라서 지붕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여 여름에는 호박이 지붕 위에 열리고 가을에는 박넝쿨의 박꽃과 박이 지붕을 덮게 된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서양의 문물이 대거 들어와서 서양식 건축이 대세를 이루게 된 때에도 돈이 없었던 당시 서민층으로서는 초가집을 짓는 것이 집을 마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교체를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교체를 하였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교체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인구의 다수가 소작농이었고 해방 이후로도 한국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서, 상당기간 빈국貧國이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짓고 살만한 사람들이 적었다.
초가집은 지붕 갈기 등 귀찮은 점이 존재했기 때문에 1950년대~1960년대에는 페인트 비슷한 화공약품을 뿌리기도 했다. 이것을 뿌리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서 초가집은 하회마을, 양동마을, 낙안읍성 같은 일부 보존된 전통마을이나 민속촌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북한에서도 한발 앞서서 1960년대에 도시지역에 아파트를 농어촌 지역에는 문화주택이라는 현대식 가옥을 대대적으로 보급을 하면서 초가집이 사라졌다.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초가집을 가난의 상징이라며 그 많던 초가집들이 대규모로 허물어지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교체를 하였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농촌에서 초가집은 대부분이 사라졌다.
2022.11.13.(일) .. 초가집이 워낙 흔했기 때문에 현대에 와선 초가집 자체가 옛 조선 민중들의 상징처럼 되었다.
2016.2.26 .. 동탄2신도시 9단지 우남퍼스트빌 아파트 분수대 공원 앞에서 SELFIE로 POSE를 취했습니다.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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